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프랑코 (문단 편집) === 무자비한 철권 통치 및 일인독재 === 스페인의 철권통치자가 된 프랑코는 군총사령관, 유일한 합법정당인 [[팔랑헤]]당 당수, 국가원수, 내각수반을 모두 겸임하며 헌법도 국민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는 폭압적 체제의 수장으로 40년 간 군림했다. 그의 권력엔 어떠한 제도적 한계도 없었고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코는 공산주의자와 무신론자들로부터 스페인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철저한 반공주의, 중앙집권, 스페인 단일국가주의를 국시로 옛 공화주의 세력, 카탈루냐/바스크 등 지역 분리주의 세력을 뿌리뽑다시피 탄압했다. 또한 이웃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살라자르]]와 함께 중남미 우파 독재정권 국가들의 콘도르 작전([[더러운 전쟁]]의 일부)을 지원했으며 우파성향의 중남미 독재국가 폭정아래 신음하다 망명온 중남미 사람들을 잡아서 중남미 본국으로 송환했다. 연좌제는 기본이었고 스페인 국민들의 탈출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았으며 탈출하다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가했다. 때문에 내전 중 전사자를 빼고 지금까지 집계된 프랑코 정권하에서의 사망자만도 20만을 넘어서며, 이것도 극히 일부라는 말이 나온다. 프랑코 정권이 정권 말기 조직적으로 대대적인 기록 말살을 저질러 정확한 숫자가 파악될 날은 멀지만, 근 몇년간 암매장된 집단 무덤이 대거 발굴되면서 희생자의 추정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같은 전간기~2차대전~대전 후 유럽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를 제외하면 이 정도 숫자의 자국민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는 없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정말로 독보적인데, 총인구 1억 7천만(1939)의 소련에서 대숙청 희생자가 681,692명인데, 스페인 인구가 내전 전후로 약 2,500만~2,600만명이었는데, 내전 사망자만 50만이고(국민진영의 사망자도 포함), 집권 이후 프랑코가 직접적으로 죽인 [[백색테러]] 희생자는 대체로 10만, 최대 30만 정도로 잡는다. '비전시 자국민 희생자'라는 카테고리로만 한정하면 프랑코 정권의 폭력성을 능가할만한 동시대 체제는 스탈린 정도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스탈린 하면 으레 따라붙는 '대숙청'의 이미지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어났다. 히틀러만 해도 당장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학살 행위는 일단 전쟁 발발 이후 점차적으로 심화된 것이다.[* 스탈린은 30년대만 해도 여타 정치인들의 견제를 받아왔다. 히틀러도 30년대만 해도 군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성 보수 우익의 협조를 얻어 정권을 유지해야 했다. 반면,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내전을 겪어 출범했다는 특성 때문에 거의 줄곧 군부가 부동의 최고 실세였다. 즉, 정권 획득 과정에서 폭력성을 겪었기 때문에 그만큼 폭력이 초기부터 매서웠다는 것이 차이다.] 프랑코는 아침식사를 한 뒤 커피를 마시면서 사형수 명부를 갖다놓고 이름 옆에 '''사형''', '''연기''', '''사형 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 등을 직접 기입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세력은 죄다 외부로 망명하거나 사형당해서 스페인 내부의 진보, 좌파 진영이 아예 절멸당했다. 이를 두고 영국의 근현대 스페인사 전공 역사학자인 폴 프레스턴은 '스페인의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했다. 반대파였던 스페인 공화국이 양성평등, 문화적 세속화, 자유연애 등 페미니즘과 사회적 진보 담론에 적극적이었던만큼 프랑코 정권의 탄압은 반대로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의 강화로 연결됐다. 여성의 간통죄는 부활하고 적극 처벌되었던 반면, 남성의 경우 남자가 간통한 여성과 동거하는 경우에만 간통죄로 인정되었고, 여성의 독립적인 재산권, 정치적, 법적 권리를 심하게 제한되었다. 특히 반대편인 공화파 여성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폭력적이었다. >우리의 용맹한 군단원들과 식민지병들은 저 비겁한 빨갱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여자들에게도 진짜 남자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애초에 저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여자들이 '자유 연애' 따위를 설파한 시점부터 이런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이제 적어도 저 빨갱이 여자들은 어디 말라깽이 민병대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남자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고, 울부짓고 발버둥쳐봐야 아무 소용없다는걸 알게 될 것이다. >---- >내전 당시 국민전선 남부군 사령관 케이도 데 야노의 주기적인 선동 라디오 채널 담화 중에서[* 원문: Nuestros valientes legionarios y regulares han demostrado a los rojos cobardes lo que significa ser hombres de verdad y de paso también a sus mujeres. Esto está totalmente justificado porque estas comunistas y anarquistas predican el amor libre. Ahora por lo menos sabrán lo que son hombres de verdad y no milicianos maricones. No se van a librar por mucho que berreen y pataleen] [[파일:mujeres republicanas_violadas y encrucedas en campo de concentracion franquista.png]] [[파일:mujeres republicanas_violadas y encrucedas en campo de concentracion franquista_oropesa_toledo.jpg]] 강간+삭발 당한 이후 이마에 십자가 무늬가 강제로 낙인 찍힌후 수용소에 수감된 공화파 여성들 내전기 내내 수만명의 공화파쪽 여성이 국가군 병사들에게 전시강간당했고, 국가군 지도부는 이를 자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위 케이포 데 야노의 사례 처럼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특히 포로로 잡은 여성 민병대원이나 점령한 지역 일대의 여성운동가, 노조 활동원 같은 정치적으로 '빨갱이' 분류당한 여성의 말로는 비참했다. 사회와 정치참여 등 '남자의 일'에 '감히' 참여한 공화파 여성들은 여성성을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명분 아래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하던짓 그대로 [[아주까리|피마자유]]를 강제로 먹이고[* 피마자유를 먹으면 설사가 나왔기 때문에 독을 먹은 사람들에게 먹여 배출하게 하는 등 설사약으로 사용됐다.] 발가벗긴 이후 동네에서 강제로 조리돌림하며 대중 앞에서 강제 분변하게 만들며 강간 후 탈진, 탈수로 죽이는게 일반적이었다. 살해당하지 않는 공화파 여성도 포로수용소 역할을 했던 수녀원에서 이런 '탈선한 빨갱이 여성'을 어찌 생각할지 뻔한 수녀, 사제들에게 집중적으로 학대, 강간당했으며, 훗날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나와도 정권의 여성 경제권 제한+전직 공화파들의 경제활동 제한이란 이중 제약 아래 자연스럽게 [[매춘]]으로 빠질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한 뒤 이를 오히려 좌파의 도덕적 타락의 증거라며 선전자료로 썼다. 그리고 프랑코 시절 법조계는 이런 전시 강간 정책에서 비롯된 조직적 남성우월주의를 돕기라도 하는 양 부부강간 불인정은 기본이고, '강간'의 의미를 무조건 여성이 심신미약 상태여야 하며, 항문이나 구강성교는 쳐주지도 않는 등 의도적으로 강간의 법적의미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고, 웬만한 성적 학대는 '단순 학대(abuso deshonesto)'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프랑코 정권의 성범죄의 전시, 통치 도구화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스페인 민주화 진영에선 반작용으로 페미니즘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유산으로 현대 스페인 페미니즘권은 성향도 강성이고 영향력도 강한 편으로 통한다. [[파일:external/www.deconcrete.org/Mass-Graves_Spain.jpg]] 프랑코 및 그 군대가 반대파를 처형 혹은 학살하고 암매장 혹은 공개매장한 장소다. 색깔 별로 발굴-이장(적색), 유실(흰색)로 구분했다. 이 지도는 스페인 법무부가 작성한 곳이다. 녹색은 아직까지도 발굴이 안된 곳이다. 가벼운 정치범들은 수용소에 가둬놓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프랑코 정권 치하에 이루어진 [[과달키비르 강]] 운하부터 철도선, 자기 영묘인 [[전몰자의 계곡]]까지, 그의 국가 기반사업이나 공업 육성 정책들 뒤에는 연평균 수십만명에 달하는 전직 공화파 출신 강제 노역자들이 있었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스페인 내전 도중과 이후 프랑코 정권은 참혹한 환경의 강제 노동 수용소[* 게다가 자칭 가톨릭 신앙을 위해 성전을 치렀다는 자가 전후 포로, '전범'수용소로 [[산티아고 기사단]]의 총본산인 [[톨레도]] 주 우클레스 수도원이나 발렌시아의 산 미겔 데 로스 레예스, 레온 주의 산 마르코스 수도원 같은 현대와선 유네스코 문화유산급의 유서 깊은 교회, 수도원들을 개조해 썼다.]를 170개 이상 운영했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미란다 델 에브로의 수용소에서는 6만 5천명의 공화파 정치범들이 왔다가며 이 중에서 수백, 수천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코 정권이 [[2차대전]]이란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프랑코 체제'라 부를 만한 것이 자리 잡은 50년대 중후반 쯤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다시 대학생, 근대 [[자유주의]] 성향의 정권 내 반독재 인사들, 망명 2세대, 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2기가 나타나게 된다. 스페인 우익과 반공주의자들은 프랑코의 '숙청'을 일종의 정당방위로 옹호하기도 한다. 1936년 여름 쿠데타와 프랑코 정권의 백색 테러가 좌파가 먼저 공격한 것에 대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세력이 적었던 곳에서도 학살은 전국 평균만큼 이루어졌다. 레온, 나바라 같은 지방은 쿠데타 발발과 동시에 거의 무저항으로 국민군에게 넘어가면서 좌파와 인민전선에 뭐 반격이고 보복이고 할 짬도 없이 집어 먹힌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도 정치적 폭력의 정도는 전국 평균에서 뒤쳐지지 않는다. 지도상 학살의 밀도는 으스스하게도 거의 스페인 전국의 인구 밀도, 도시화율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의 폭력성과 탄압은 정치인들이 역사적 기억 가지고 정치질하는게 늘 그렇듯이 현대 지역주의, 분리주의와도 연관이 있는데, 적어도 당장 통계적인 평균 수준으로 보면 프랑코 정권은 카탈루냐, 바스크,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가리지 않고 소위 '빨갱이' 딱지 붙기만 하면 공평하게 때려 죽였다. 물론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 같은 경우 당장 사람들도 죽아나가면서 각 민족들의 유서깊은 고유언어, 고유문화까지 근본도 없는 파쇼 독재정에게 공격당하며 분명 스페인의 문화적 중심부 지방들보다도 더 원한이 서리긴 했지만 직접적인 폭력의 밀도 자체는 지역별로 그리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스페인 현지에서도 카스티야가 보수적이고 프랑코 정권이 표방한 스페인 국가주의의 핵심 지방이라 덜 두들겨 맞았다는 주장이 가끔 돌고는 하는데, 유럽에서도 꼽아주는 국제 대도시인 마드리드와 대조적으로 완전 인구, 경제 기반 다 털리고 정치적으론 우경화, 사회경제적으론 깡촌화되면서 정체성 자체도 아예 갈라진 현대 카스티야, 마드리드의 차이를 1930, 40년대 상황에 오독해서 적용한 시각이다. 50-60년대 프랑코 정권의 부분적 통제 완화와 스페인 경제기적으로 인해 스페인 전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국내 이민자들이 몰려오고 카스티야 정체성이 희석되기 전까진 마드리드는 온전히 아무런 이견도 없는 신카스티야의 일부였다. 이런 시대적 차이를 고려하면 카스티야나 특정 지방에 대해 프랑코 정권이 관대했다는 소리는 적어도 현대 스페인 최대 단위 행정구역인 자치공동체 단위로는 통계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소리이다. 그나마 자치공동체 내부 주 개별 주 단위로 들어가면 지역간 유의미한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지만[* 단적인 예를 들자면 같은 바스크 지방 내에서도 비스카야, 기푸스코아는 집중 학살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옛날부터 바스크 문화 못지 않게 부분적으로 카스티야 문화권에도 걸쳐 있었고, 지역 정치 지형은 차라리 옆동네 [[나바라]]에 가까워 보수성향이 강했던 알라바는 확실히 탄압을 덜 당한 편이다. 친프랑코 성향이 가장 강하다는 구카스티야 내에서도 지역 사회의 자체적인 지식인 사회, 마드리드 수도권과의 인접성 때문에 나름 지역 좌파, 자유주의자 세력이 있었던 세고비아, 해당 지방 내에서 최대도시로서 당연히 정치지형도 더 다양했던 바야돌리드 등은 '카스티야는 덜 당했다'란 말이 나오는거 자체가 무색했던 반면, 아예 지역 좌파, 자유주의 세력 자체가 생길수가 없을만큼 깡촌 영농사회가 오래 유지됬던 아빌라, 사모라 같은 지방에선 때려 죽일 좌익 자체가 별로 없긴 해서 눈에 보이는 통계는 덜 당한걸로 보인다.] 카스티야, 카탈루냐, 바스크, 안달루시아 같은 스페인 국내 거대 지방, 민족 단위에선 프랑코 정권은 그냥 공평하게 살벌하고, 폭력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